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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록부

생각이 또 많아지고 나는 온데간데없이 쓸데없어진다

by 일상변주가 2020. 6. 6.

둔탁한 머리를 일으켜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쌔근쌔근 잠자는 남편이 깰까 조심스레 창을 열고 복도로 나가 문을 살짝 닫아주었다.
저녁에 사다놓은 맥주가 생각났다. '아, 지금 마시는 술은 분명히 독일텐데, 마셔도 될까.' 냉장고에서 차가워진 맥주를 꺼내들고 캔주둥이의 먼지를 닦아내면서도, 유난히 큰 소리를 내며 따고나서도, 한입 마시고, 두입세입을 꿀떡 삼키고도 나는 망설인다.
큰 창을 열고 시원한 새벽공기를 느껴본다. 휴일전날이라 그런지, 지금 시간까지 불켜진 집들이 종종 보인다. 다들 무슨 이유로 깨어있는걸까.

낮동안 있었던 일로 머리가 복잡하다. 역시나 난 혼자서 일해야하나싶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나 정도의 지식수준이면 전체 흐름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일을 하면서도 재미있게 느껴졌고, 코칭하면 잘 따라와주는 직원들이 기특했다. 전문용어라거나 약자들은 그 업계를 조금만 알면 쉽게 익힐 수 있는 수준이었고, 어렵게 꼬아 말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다니는 회사는 알수없는 약어에 그 업계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전문용어로 점철된 곳이다. 매일매일 새로운 용어와 방식에 대해 치열하게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다. 처음 이 회사에 발을 들였을 때는 매일 토할것 같은 기분으로 회사를 다녔고 몰래 공부해서 아는척을 해야했다. 지금 바뀐 점이라면, 일주일에 한두번 토할것 같고 몰래 공부하고 아는척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고 볼 수는 있으나, 여전히 나는 매일 머릿속 전쟁을 겪는다.
부족한 것은 나만의 속도로 메워가면 될 줄알고 포기하려던 마음을 달래곤 했으나, 기본적으로 부족한 소양은 메워지지 않는것 같다. 나의 기준으로 내 직속 아랫 직원들에게 선의를 갖고 대했다고 생각하나, 그들이 뿜어내는 오오라는 부족한 팀장을 보는 눈초리로 받아진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어떻게 했으면 저들이 저렇게 행동할까 싶어 자괴감이 느껴진다. 업무를 진행함에 있어 효과적인 방법만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미움을 받는지, 왜 대접을 받지못하는지에 더 관심이 쏠려있는 내 모습이 더 한심하고 신경쓰인다.

이십대 중반부터 회사를 다니며 이런저런 사람들과 부딪히고 감정고민을 하면서, 잠도 설치고 마음의 병도 생겼었다. (이전 회사는 일을 즐겁게 했으나, 몇 사람이 싫고 발전없이 정체된 회사분위기에 퇴사를 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불혹이라는 점에 도달했음에도 숫자만 도달했을 뿐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지금이라도 얼른 빠진다고 말할까. 매달 꼬박 들어오는 월급의 달콤함이 끊어지는것은 두려운데.
사람들과 일을 진행하다 듣는 갖가지 전문적인 용어와 문장들을 스마트한 척 하며 끄덕이다 뒤돌아서서 공부하는 상황이 고통스럽다. 고통의 순간이 지나면 재미로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분명 있지만 부담감의 수준이 늘 거대하다.

요즘은 출퇴근을 하다가 사고가 나는 순간에 대한 상상을 많이 하게된다. 내가 6주정도의 진단을 받고 입원을 한다면 지금의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막힌 상상.
요즘 짙어지는 생각 중 하나는 결혼을 하지않았다면 나는 나를 오롯이 믿어주는 동료 하나없이 세상을 살아야한다는 부담감에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나는 내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하다. 완벽하게 일을 준비하지 않으면 어딘가 부족함이 몹시 불안해 잠을 쉽게 설치곤 한다.

자신의 수행능력 판단에 관여하는 두 하위영역은 배외측 전전두엽피질과 안와피질이다. 이 둘이 과도하게 활성화되면 우리는 자신을 가혹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재즈 음악가들은 즉흥연주를 하는 동안 이 영역을 꺼두어야 한다. 그래야 끊임없이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말하는 성가신 자기평가 없이 자유롭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정리하는 뇌, 대니얼 J. 래비틴

나는 계속해서 저 상태인 것이다. 내가 실수했다가 사업이 망가지면 어쩌지? 내가 한 실수로 회사이미지를 실추시키면 어쩌지? 어설픔으로 다른 직원들이 나를 우습게 보먼 어쩌지? 그때는 이렇게 할걸, 저때는 저렇게 해야겠다, 머릿속에서 자기검열로 전체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면 나는 언제나 불안함에 벌벌 떨고있다. 그래서 쉽게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귀결되고는 한다.

고개를 숙여 핸드폰에 타이핑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동그랗던 달이 금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즈넉한 시간에 맥주 한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