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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록부

사회초년생 시절 이야기

by 일상변주가 2019.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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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아나키스트 소설가를 기억하며

 

 회초년생 시절, 내가 다녔던 회사는 소기업치곤 건물의 2개의 층을 쓰고 있었고 40~50명의 규모로 꽤 큰 사업을 하던 곳이었다. 첫 회사는 첫사랑처럼 잘 잊히지 않는 것인지 그때의 멤버와 환경이 내 머릿속에 생생하다. 그 어릴 적의 나는 그저 회사에 다니고 언니 오빠들과 음악을 함께 들으며 밥 먹고 야근하는 자체가 몹시 흥미로웠다.

 

회사에는 인트라넷이 잘 구축되어 있었고 거기에서 업무 세팅 및 공지사항 등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또한 회사 직원들끼리의 소통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익명게시판도 있었다. 예상하다시피 익명게시판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로 치솟았다. 게시판의 특성상 서로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이런저런 얘기가 많았다. 회사라는 특성 때문인지 어느 수준 이상의 격한 글은 볼 수가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회사 내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시리즈의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글은 소설의 특성을 띠고 있었는데, 그저 평범한 회사원들의 이야기인듯했으나 읽다 보면 어쩐지 회사의 상사들과 매칭이 되곤 했다. 그 글의 인기는 그야말로 사내에서 인기였고 사내정치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던 상황이었지만 친하게 지냈던 그룹의 언니가 상황을 해석해줬기 때문에 재밌게 읽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저 재미있는 소설이 흥미로운 주변의 이야기로 탈바꿈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계속될거라 생각했던 그 재미있는 소설이 갑자기 사라지게 된 사건이 있었다. 아침에 출근해보니 한 직원의 피씨가 뜯어진 상태로 책상 위에 올라가 있었고, 주로 그 소설의 악덕 주인공으로 간주되었던 실장이 몹시 화가 난 상태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출근이 어느 정도 완료되자 실장은

 

"이 새끼, 회사 하드 다 뜯어서 날랐어! 그 글도 이 새끼가 다 쓴 거야!"

 

하고 끌어 오르는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와 동료들은 하드를 들고 날랐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기도 했지만, 그 소설의 작가를 알게 되어 더욱 놀랐다. 마치 소설로 예고를 하고 물건을 훔치는 괴도 루팡처럼 느껴지는 그 직원에게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그는 회사를 떠난 후라 더 알길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실장은 익명게시판의 모습을 띠고 있는 곳의 아이피를 추적하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실장은 몇 시간 뒤 다른 층을 다녀오더니 겸연쩍은 얼굴로

 

"아, 누구 씨가 어제 사직서를 냈는데 하드에 든 거 백업한다고 아래층(서버실 및 프로그래머의 공간)에 가져가서 거기 있었네. 허허."

 

 지금 생각해도 그 실장이 얼마나 민망했을까 싶어 안타깝다는 생각까지 든다. 아마 지금의 내가 그 사람보다 나이가 더 많이 들어서일 수도 있고 그 자리가 얼마나 힘들고 눈치 보이는 자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일것이다.

 

 나는 그 날 이후로 1년을 더 다녔었지만, 그 '소설가'는 사건이 있던 날 퇴사를 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소설을 읽을 수도 그의 소식을 들을 수도 없었다. 아주 간혹 그런 일이 있었다며 동료들끼리 잡담 소재로 몇 번 오르기는 했지만 금세 일상에서 지워져 버렸다. 하지만 15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계속 그 사건이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소설가'에 대한 흥미가 존경심으로 바뀐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때 그는 20대 중후반으로 그렇게 많지 않은 나이였는데, 그런 흥미로운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썼다는 것만으로도 경외심이 들 정도이다. 심지어 회사 상사의 행동과 있었던 일을 고발하는 내용이라니, 내게 있어서는 아나키스트 소설가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이를 먹어도 주변 사람들로 소설을 쓸 엄두를 내 본 적이 없다. (좀 재밌을 것 같기는 하다) 

 

오늘은 그 아나키스트 소설가를 생각하며 글을 마무리해본다.

 

 

+ 그때를 생각하면 힘들었던 기억보다 즐거웠던 기억이 많다. 비록 출퇴근 시간이 왕복 4시간에 달했지만, 당시 초년생이었던 내가 일을 해서 정당하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과 인정받고 직장인으로서 살 수 있다는 것 자체에 행복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다닌 지 1년이 좀 지났을 시절부터 월급이 한두 달씩 밀리고 회사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회사에 남아있던 멤버들끼리 회사의 미래와 우리의 미래에 대한 회동이 잦아졌었는데 나는 그것 또한 재미로 느껴졌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철없는 막내가 따로 없지만 다시못올 소중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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