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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록부

안티-집요함이 만든 현재

by 일상변주가 2019. 5. 5.

 문득 돌아보니, 무언가 한가지를 끈덕지게 진행한적이 없다. 먹을만큼 먹었다고 할 나이에 깨닫게 되었다. 요즘 큰 인기와 파장을 몰고 있는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보면서 학부모들은 되려 입시코디를 찾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학부모입장이 아니어서 그렇겠지만 나는 꿈을 가지지 못한 채 어른이 된 사람들의 결과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미래의 문제는 청소년들만의 것이 아니라 나이가 지긋이 찬 어른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미래는 과거에서 만들어온 결과의 조합이므로 미래의 문제는 또한 과거의 문제다. 드라마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주제인 '공부'를 놓고 보자면 '사교육'이나 '선행학습' 등으로 자신들의 현재속도를 빠르게 맞춰놓는것이 가능하다. 그에 따라 교육의 속도가 '집안의 형편'에 따라 다른 상황이 되어버려서 문제라고는 하는데, 입장바꿔 그들의 상황이라면 가능한데 안할 이유가 없을것이다. 드라마 주연 중 한명이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가 재력이 없어, 부모가 능력이 없어? 있는 걸 활용하겠다는데 뭐가 문제가 돼?" 그 말에 공감할 수 있는 현실은 아니지만 심적으로는 공감했다. 누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걸 십분 활용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더 가지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던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한가지를 끈덕지게 못하는 '안티-집요함'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 아닌가 싶다.

 기억나는 어릴적부터 나열하자면, 학교에 들어가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어선생인 사촌언니를 필두로 하여 4살터울 오빠와 동네 초등학생들(그때는 국민학생이었지만)이 모여 우리집에서 영어사교육이 진행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 사촌이며 우리집에서 진행되는 영어과외였기 때문에  엄마의 특별한 부탁으로 나까지 꼽사리 껴서 수업엘 참여할 수 있었다. 요즘과 다르게 그 때 당시의 초등학생에게 영어가 필수가 아니었기에 알파벳부터 배우는 과정으로 시작되었다. 에이..비.. 참으로 신기했고 재미있다고 느꼈지만 두어번의 수업 뒤에는 불참했다. 아무도 나에게 억지로 수업을 들으라고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피아노수업이었다. 그래도 이건 꽤나.. 오랜 기간동안 다녔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5학년이 될 때까지 계속 이어졌으니 말이다. 그 정도면 베토벤 모짜르트 등을 마스터 했겠네, 라는 말을 듣고 지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피아노를 쳤지만 악보를 볼 줄 몰랐다. 제일 기본인 '다장조'만 봤다. 피아노 치는걸 좋아했지만 악보보는것은 끔찍하게도 싫었다. 선생님이 한번 쳐 주면 흉내내며 따라쳤다. 이런 얘기를 하면 와, 천재였나봐,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게 다였다. 어릴땐 내가 절대음감이라고 생각하면서 자기잘난맛(자뻑)에 취해 지냈던 것 같다. 물론 이론적으로 '시-미-라-레-솔-도-파' 샵이나 플랫의 구조는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 하는 음악시험에는 늘 그 문제가 나왔으니까. 하지만 피아노를 칠 때는 샵이나 플랫이 붙는 악보는 보고싶지 않았다. 대강 위치를 보고 기억나는 음을 따라쳤다. 아무튼 계속해서 학원을 다니다보니 가야하는 일이 의무고 버겁게 느껴졌다. 그래서 학원을 빼먹고 몰래 친구들과 어울려 놀거나 트렘폴린(내가 살던 곳은 퐁퐁이라고 불렀다)을 타며 시간을 떼웠다. 피아노 치는것을 끝내게 된 때는 창문너머로 내가 하교하는걸 지켜보고 있던 선생님이 내 가방을 붙잡고 학원으로 질질 끌고 간 후이다. 엄마는 내가 피아노치는걸 너무나 즐거워하는줄 알고 오랫동안 투자한거였는데 그렇게 자꾸 도망갔다는걸 알고는 바로 학원보내는걸 중단하셨다.(그 후로는 어떠한 학원이든 다니는 걸 반대시는 부작용이 생겼다)

 그 후의 기억은 정말 단편적으로 짧게 짧게 진행했던 거라 쓸만한 수준도 못 된다. 미래의 만화가가 되겠다며 만화동아리를 자체적으로 만들어서 진행했으나 채 몇주도 되지 않아 흐지부지 되었고 살을 빼고 멋진몸매를 갖고싶다며 시작했던 다이어트도 실패하길 수십차례이다. 큰 기대를 가지고 떠났던 유학길에서는 남들 하는만큼만 영어공부를 했고 거기서 하던 알바도 두달만 다니다 끝이 났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영어공부를 드문드문 하는 바람에 10년이 지난 지금은 듣기도 말하기도 너무 어렵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굉장히 오랫동안 꾸준히 한 일이 있다. 15년간 한 회사를 다닌 일이다. 7년 일하다가 그만두고 어학연수를 떠났고 돌아와서 다시 그 회사를 다녔다. 주변에서 왜 다시 갔냐고 말렸지만 다른 회사를 찾아보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편한 길로 성큼성큼 들어간 것이다. 그때는 1년만 다니고자 했지만 다시 8년이 다 되도록 회사를 다니게 되었던것이다. 한 회사에 그렇게 오래 다닌것에 대해서 주변에서는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하지만 그것 또한 안티-집요함 때문에 가능했던 일인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모험심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15년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한 상태이다. 그만두는것이 정말이지 너무나 힘들었다. 그만두는 과정에 대해선 다음에 다른 주제로 다룰까 한다. 그 얘기도 한바닥은 나올것으로 보인다.

 내 인생에서의 '안티-집요함'을 정리하다보니 앞으로는 좀 다른 미래로 방향을 틀어야 할 것같다. 이제 두달째에 접어든 이직도 그 줄기의 시작이라고 보면 그래도 조금은 집요함에 가까워진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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