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기록부

짧은 깨달음

by 일상변주가 2019. 5. 23.
728x90

 당혹스럽다.10분전까지만 해도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 누구든 경험할 수 있지만 누구나 그 길을 가지는 않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표지판만 보고 방향을 틀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지만)평탄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날 무섭게 할줄은 몰랐다.

 뒷산에 가는듯한 기분을 안고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아점을 산 중턱에서 여유롭게 먹으리라 맘먹고 편의점엘 들러 애정하는 계란샌드위치와 커피우유를 샀다.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이 꽂혀있어 편의점 사장님이 내게 거는 말을 듣지 못했지만 대충 할인 및 적립카드가 있는지를 묻는 말일거라 생각했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눌러 정지시키고

-아뇨. 하고 답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맥락과는 다른 말씀을 하셔서 사고가 정지됐다.

-말씀하세요.

 도대체 무슨 말이 앞에 있었기에 이런 문장을 내게 쓰셨을까. 궁금하지만 미처 뭐라고 말씀하셨냐고 물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냥 계산이 끝난 물건을 집어넣고 문을 향하자 사장님은 더욱 이상한 목소리를 냈다.

-흐흣. 안녕히가세요.

-...? 안녕히계세요.

 걸어서 산으로 향하는 길에 계속 그 사장님의 토막 난 문장이 떠올랐다. 돌아가서 뭐라고 하셨는지 물어볼까. 에이, 뭐하러. 그런데 궁금한데, 굳이 힘들게 숨겨놓은 에그샌드위치를 찾아 계산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뭔가를 더 말씀하셨나. 블루투스 이어폰을 보청기로 생각하시고 웃으셨나. 사소하고 의미를 찾을수 없는 궁금증을 머릿속에 굴리며 발걸음은 계속해서 산으로 산으로 나아갔다.


 처음 걸어보는 길이었다. 끝없이 이어 질 것같던 익숙한 아파트단지들을 지나, '우리 동네'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어색한 동네가 나왔다. 오래된 빌라 단지를 지나니 산에 텃밭을 일군 산의 초입이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산을 등에진 집들 사이로 나 있는 흙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귀에 꽂은 이어폰을 뽑아 이쁘게 네모진 이어폰 충전기에 꽂아놓자 산행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푸드덕 짹짹 삐육삐리릭 휘이이잉 프스스 탁 틱 샤르르..
산에는 온갖 산에 사는 것들의 소리가 났다.

 머리가 복잡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일 때면 늘 산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머리를 비우고자 드디어 산행을 선택했지만, 딱히 건설적인 생각은 나질 않았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나는 왜 이 길에 서 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지오디의 길을 흥얼거렸다. 천천히 오르다 보니 사람의 발길이 드문 길이 나와 그곳에 가방을 내렸다.

 산에 물이 많으면 물길이었을 텐데, 메말라 흔적만 보였지만 이 정도면 식사 장소로 괜찮을 듯싶었다. 편의점에서 사 온 샌드위치와 커피 우유를 꺼냈다. 이상하게도 매번 커피맛우유는 마실때마다 너무 달아 질린다고 느끼면서도 가끔 이렇게 다시 사 마시고는 -으 달어, 를 뱉고마는 실수를 반복한다. 나의 산속의 아점시간이 넉넉하게 여유로울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타날까 벌레가 나무에서 떨어져 붙을까 노심초사하며 서둘러 빵을 베어 문다. 산에서 짝을 지어 장난치는 새들을 시청하며 오물거린다. 고소한 맛을 내는 에그샌드위치는 매번 배신을 하지 않는다.
 저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다 먹고 난 샌드위치와 우유갑을 가방에 구겨 넣고 일어나 걸었다. 위를 채우니 걷기가 힘들어졌다. 둔해진 다리를 겨우 움직이며 산에 있는 절로 들어갔다. 얼마 전 부처님오신날을 치른 절의 분위기는 잔치를 마치고 여운을 잠재우려 침착해진 모습이다. 사람은 보이질 않았지만 잘 관리되고 있는 절이었다. 나의 뒤로 걸어 올라오던 아저씨는 어느새 느리게 걷고 있는 나를 지나쳐 절 여기저기를 기웃대며 탐색한다. 산에 오르는 이유는 혼자 생각하고 싶음의 이유가 있기에 그분이 간 곳과는 다른 곳을 둘러보려 방향을 틀었다. 높게 뻗어있는 계단을 오르니 양옆으로 색색의 등이 달려있고 그 위 큰 바위에 부처님상이 조각되어 있다.

 집 가까이에 이렇게 멋진 곳이 있었구나 싶었다. 부처님상은 아래에 펼쳐진 사람들이 사는 동네를 굽어 살피고 있는 모습으로 되어있다. 턱을 지켜 들고 한참을 보다 옆에 털썩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여기저기 설정해놓은 알림들이 리스트업 되어있었다. 밀어 삭제, 밀고 또 밀고. 산에 오른다고 해서 속세와 떨어지는 것은 아닐 텐데, 이곳에서의 나는 이상하게 그 알림이나 핸드폰을 보고 있는 내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아까 그 아저씨가 내가 있는 곳으로 오는게 보인다. 절 내부를 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니 뻔하게 여기저기가 겹쳐지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혼자 즐기는 고즈넉한 시간을 방해받는 기분이 든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본다. 동굴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처님을 모셔놓은 동굴이었다.

 종교는 없지만 나도 모르게 신발을 벗고 들어가 절을 했다. 몇번을 절해야 하는지 몰라 한 번만 하고 물러 나왔다. 운동 삼아 108배를 한 적은 있는데 이곳에 와서 갑자기 하기는 멋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에서 나오니 아까 본 아저씨가 절 아래서 서성이고 있다. 괜히 나를 의식하며 서 있는 모습이 꽤 부담스럽다. 그 아저씨가 있는 방향을 피해 또 다른 계단으로 오른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난다.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놓는 컵이 하나 놓여있고 예쁜 정자가 놓여있다. 손으로 물을 만져보니 뭔가 미끄럽다. 마시는 건 좀 위험할 것 같다. 정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등을 뉘었다. 바람 소리, 새 소리가 좋다. 고즈넉하게 여유를 즐기는 기분이 좋았는데 그 아저씨가 어느 새 이 곳으로의 계단을 올라 물이 나오는 곳의 사진을 찍고 있다. 불편한 마음이 다시 가중된다. 모르는 사람에게 -혼자있고싶어! 라는 말을 갑자기 뱉을수는 없었다. 그 대신 얼른 그 아저씨가 다시 내려가기를 바라며 피하지 않고 정자에 앉아 핸드폰을 보며 집에서 보던 유머글을 이어봤다. 나를 일부러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만 더 이상 불편한 동행은 하고 싶지 않다. 한참을 머물던 아저씨가 계단을 내려가자 짐을 챙겨 반대편 산 위로 쭉쭉 올라갔다.

 지도를 보니 이대로 올라가면 반대편 경기도에 있는 수목원에 닿을 수 있다. 수목원을 구경하고 버스를 타면 집에 갈 수 있겠다는 계산이 떨어졌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일반 운동화로 험한 산길을 내려가는 게 겁이 나기 시작한다.

 표지판이 세 갈레로 갈라진 길 앞에 서 있었다. 그걸 보니 집과 너무 먼곳으로 가기보단 동네 근처로 내려가고 싶어졌다. 방향을 틀어 계산되지 않은 곳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더 내려가는 길이 험했다. 걷기에 최적화된 운동화는 계속해서 찍찍 미끄러져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거의 기다시피 하며 내려가다 보니 등산로가 끊겼다. 지도 앱을 보며 맞는 방향으로 추측되는 곳으로 계속해서 이동했지만 사람 발이 닿지 않은 태고의 자연만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뱀이라도 나올까 손에 쥐고 있던 나무작대기를 휘적거리며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거미줄, 푹푹 빠지는 바닥, 귓전에 계속 윙윙대며 따라오던 벌레 소리에 멘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혼자 호기롭게 시작한 가벼운 등산이 무거운 실족사로 끝맺을까 봐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방에 계시는 엄마를 부르짖으며 무엇에 쫓기듯 산을 헤매었다. 한참을 바보같이 뛰니 잘 닦아놓은 등산로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 감사합니다. 드디어 사람 냄새에 기뻐하며 사람의 손길이 닿은 벤치에 나무작대기를 내려놨다. 하나둘 아무렇지 않게 등산하는 사람들이 반가웠다.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머리에 매달려있던 거미줄과 옷에 붙은 풀잎을 털어냈다. 이제는 등산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산을 내려왔다. 고맙게 동행을 해준 나뭇가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여기저기에 던져놓고 시멘트 길을 밟았다. 시멘트로 된 길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산을 벗어나자 카페라는 간판이 보인다. 커피라도 마시며 나의 외로운 사투의 시간을 정리해보자, 싶었다. 중년의 부부가 운영할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외벽을 지나 정문으로 향했다. 산을 바라보도록 설계된 곳이며 재즈풍의 음악이 흐르는 걸 보며 오해라는 걸 깨달았다. 코지한 분위기와 고급 장식품, 세련된 소파들로 구성된 카페, 말쑥한 차림을 한 젊은 바리스타들. 심지어 커피값도 스타벅스보다 비싸다. 실내에 차려입은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좀 전까지 머리에 거미줄, 엉덩이에 흙, 다리에 풀이 붙어서 들어온 나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자연스럽게 주문하고 화장실로 가서 옷매무새를 다듬고 나와 1인용 소파에 앉아있다. 산에서 혼자 아무도 못 볼 쇼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앉아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일상기록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운 곳에 다시 적응하는 시간  (0) 2019.07.29
강아지 이야기  (0) 2019.06.04
좀비여, 내 뒤뜰에는 나타나지 말지어다  (2) 2019.05.05
매너가 꼰대를 안 만든다  (0) 2019.05.05
선생님께  (0) 2019.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