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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록부/나를 이해하기

턱괴짤이라니..

by 일상변주가 2023.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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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7년쯤 전이려나.. 회사에서는 공용메신저로 무료툴인 네이트온을 채택해서 쓰고 있었다. 네이트온의 또 다른 장점은 수많은 이모지를 직접 등록해서 쓸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때 회사에 애니메이터도, 그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아서 각자 하고 싶은 말을 그림으로 그려 등록하고는 했다. 나도 그중에 하나여서, 평소 장난을 많이 치던 설계자와 대화 중에 '나는 니 말을 진득하게 듣긴 하지만 멍 좀 때릴게.. 글쎄 그냥 뭐 일단 알았어 말해봐'와 같은 느낌을 주는 이모지를 쓰고 싶었다. 그때 당시에는 플래시(Flash)라는 툴을 회사에서 작업용으로 썼기 때문에, 태블릿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슥슥 그려서 바로 등록이 가능했다.

그래서 눈은 먼 허공을 바라보는듯, 손을 포개고 턱과 겹친 그림을 그렸다.

플래시로 바로 그리고 원본 파일은 버렸는데..

이 이모지를 등록해서 바로 썼고, 같이 대화를 하던 설계자는 넘 마음에 든다고 깔깔거리며 자신의 이모지로 바로 등록을 했다.

위는 내 조카사진인데, 넘 귀여워서 등록.. 아래는 나도 어딘가 줍줍해서 자주 썼던 '아련..'짤

회사 사람들간 이모지 등록하고 함께 쓰는 게 워낙 많았던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고 이직과 많은 챗툴의 변화를 겪으며 시간이 한참 지났고, 그 이모지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2년전쯤, 깜짝 놀라는 일이 있었다. 내가 그린 그림이 유튜브에 짤로 나오는 것이었다. 

"어어? 이거.. 이게 왜 여기서 나와?" <- 정말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린 간단한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쓰는것이 정말 신기했고, 심장과 머리에 약간의 전기가 스치는 듯했다.

(그리고 또 뭔가 이거 내가 그렸는데..(!!)라고 소리치고 싶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나 또한 다른 사람의 이모지를 슬랙에서 수없이 등록, 사용 중이어서 나도 무언가 나눔에 일조했다는 생각에 뿌듯하다고 생각하고 마무리 지었다. 

8개월 전 이직한 이곳은 '~님'문화를 쓰는 곳으로, 평소에 직급체계로 서로 위계를 형성하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나이 차이가 어떻든, 국적이 어떻든 서로 평등하게 **님으로 부르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있는 곳이다.

예전보다는 이모지를 덜 쓰지만, 지금은 애플/슬랙 기본 이모지😊가 워낙 풍부하게 나와서 추가 이모지는 그다지 등록하지 않고, 기본에 충실히, 적절히 점잖은 척 쓰고 있다. 

그런데 회사 내에 이모지 등록에 열성적인 사람이 있었는데, 이 이모지를 '턱괴짤'이라는 이름으로 등록해 놓은 것을 보고 속삭였다.(이때가 남편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밝힌 사람.. 뭐 원본이 없어 증명 못하고, 그 후로 그림을 거의 안 그려서 더더욱 증명을 못하고, 주변에서 많이 쓰는 것 같지도 않고, 뭐 여차저차해서 굳이.. 싶어서.)

 

"그거 아세요? 이 이모지.. 

제가 예전에 네이트온에서 이모지 만들어 쓸 때 그린 그림이에요. 어느순간 보니 웹상에서 돌아다니더라고요. ㅋㅋ"

 

 

"아? 00님이 제작하신거라구요????????????????"

 
"원작자????????"
 
"헐"
"여기에 레게노...."
"이 누추한 곳에 어떻게 이런 귀하신 분이........."
"아유, 증명불가해요.. 짜피.."
 
"플래시서 슥슥 그려서 이미지만 저장하고 원본은 버렸기 때문에"
 
"영광입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모지를 A4 용지에 프린트해 오더니, 싸인을 요청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팬이라며 싸인 요청을 받고, 이 분의 재밌는 센스에 정말 배꼽을 잡고 웃었다. 다음날 다른 분도 '내 주변 가장 유명한 크리에이터'라며 싸인을 요청했고, 부끄러움과 동시에 그동안 실패했던 카카오톡 이모지들이 생각나서 씁쓸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정말 10초 만에 슥슥 그린 이 그림이 사람들 마음에 조금이라도 다가가서 너무 기쁘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짤의 응용버전이 정말 많다고 하기에 찾아봤는데, 정말.. 와.. 너무너무 어마했다. 

 

from 인벤.. 리스펙합니다. 진짜.
전역모에도.. 감사할 따름

갑자기 그림 좀 열심히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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