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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록부/나를 이해하기

20년간 회사원, 여전히 회사원

by 일상변주가 2023.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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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쯤 일하면 어느 분야의 전문가라 인정을 받지만, 20년 가까이 되면 어느 분야의 고인 물이 되어버리는 현실을 아는가.

경력이 10년쯤이 될 때까진 아니 좀 더 여유 있게 봐서는 15년이 될 때까지는 경력이 많이 쌓였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20년 가까이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드물었고, 상상조차 되지 않는 숫자였다. 어쩌면 나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그들처럼 은퇴하고 2세를 돌보거나 개인사업을 하고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던 것 같다. 20년이 지나고 어디 가서 경력을 민망해서 말 못 하는 처지가 되고 나니 이 많은 경력기간을 어떻게 하면 줄여볼까 궁리를 하곤 하는데, 실질적으로 쓰고 싶지 않은 경력을 이력에서 제거했는데도 18년이 되는 것을 보니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쓸 때마다 느끼는 건데, 어쩜 이렇게 글빨이 늘지 않는지 참 알 수 없다. 그래도 꾸준히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건만 그 많은 작가들의 글빨은 대체 나에게 하나도 전달이 되지 않는 것일까. 20년간 회사원으로 지냈건만 회사를 다니는 건 여전히 어렵다. 늘 모르는 것이 많아 배워야 할 것들 투성이고, 기술은 쉴 새 없이 발전하여 내 목덜미를 잡는다. 배울 것이 있어서 신나기도 하지만 가끔은 턱끝까지 숨이 차오르는 기분도 든다. 매년 새해 목표를 잡을 때 '자기 계발'이라는 항목이 빠지질 않는데, 올 해도 그러했고 내년 목표도 그러하다. 올해에 만족할 만큼 열심히 자기 계발을 했는지 물어본다면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꾸준히 놓지 않고 흘끗흘끗 봤다는 것으로 어느 정도 자기 위로가 될까 모르겠다. 20년쯤 경력이 쌓였지만 나는 여전히 실무자다. 세세한 픽셀을 다듬고 그리드를 세워 맞추며 래디어스를 신경 쓴다. 물론 실무보다 더 신경 써야 하는 건 팀원들을 살펴보고 끌어올리는 것이지만 실무를 계속해서 놓고 싶지 않다. 아직은 팀원들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 늘 타이트하게 일을 하지만(그렇다고 더 많이 일한다는 뜻은 아니다) 실무를 하는 것이 팀장역할을 하는 것보다 더 즐겁다. 가끔 예전부터 알던 사람이든 최근에 알게 된 사람이 든 간에 그들이 나에 대한 평가로 일 잘한다는 얘기를 할 때 가장 뿌듯한 감정을 느낀다. 일을 잘하긴 하는데, 참 예민한 사람이야-라는 부록도 따라오긴 했지만.

 

오늘은 팀원들과 올 한 해를 돌아보는 회고를 진행하기로 했다. 업무의 관점이 배제될 수는 없겠지만, 개인들의 성취나 자아성찰 쪽으로 좀 더 초점을 맞춰 진행해보려 한다. 그러고 보니 올 한 해는 팀을 세팅하기 위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새로운 사람이 왔다가 평가가 좋지 못해 나가게 되었고, 수많은 이력포폴 검토와 면접을 보고는 중국인 팀원까지 뽑아(이력/포폴 검토 당시에는 중국인인걸 전혀 몰랐지만) 잘 세팅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년에는 1명을 더 충원하기로 하여 아직 이력서와 포폴, 면접 지옥을 헤매고 있지만 앞으로도 마음 잘 맞는 팀원을 잘 뽑아서 이러한 분위기와 진취적인 마인드를 유지한 디자인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어쨌든 내가 잘 뽑으면 되는 거겠지. 사람은 경험해 봐야 아는 거지만.

 

오는 이력서를 살펴보면 경력 2년에서 18년까지 참 경력범위가 방대하다. 어제 인사팀 직원이 경력 너무 긴 사람은 자체적으로 배제해야 하는지에 대해 물어봤다. 팀원을 뽑는 거니 경력 18년은 배제해 주는 게 맞긴 하지만, 어느 정도 감정이입이 되어서인지, 그냥 달라고 했다. 이력서와 포폴을 봐주는 게 예의라는 생각에서다. 경력이 많으면 이직하는 게 쉽지 않다. 팀장급이 아니라 팀원을 뽑는데도 경력과 관계없이 다양한 이력서들이 날아온다. 그간 다녀본 회사 중에서 제일 많은 이력서와 포폴을 검토하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고 싶어 하는 회사라는 뜻인데, 나도 그간 다닌 회사 중에서 제일 합리적이고 오래 다니고 싶은 회사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회사에서 업무뿐 아니라 소모임, 스터디모임도 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긍정적인 마음이 돌고 있는 느낌이 든다. 물론 체계가 좀 부족한 부분에서는 개선해야 하는 부분도 많은 회사이지만 그래도 발전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내가 어느 정도 체계를 도입한 케이스여서 참 잘했다고 다른 사람들도 칭찬하고 나 자신도 나를 칭찬하기도 한다(칭찬으로 나고래가 번쩍 점프를 하네).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일과 관련된 많은 것에 흥미가 생기고 즐거운 상태로 일하고 지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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