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고 계시는지요.
세월이 너무나 많이 지나 아마 기억하기 어려우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선생님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답니다. 그 시절에는 선생님의 인기가 너무나 높아, 선생님을 사모하는 아이들이 무척이나 많았었지요. 그중에 저도 하나였습니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교무실의 선생님 자리에 수줍게 커피나 율무차를 가져다 놓았고, 그 당시에는 외모를 어떻게 꾸며야 할지도 몰라 쇼트커트로숏컷으로 머리를 자르고 다니던 아이였습니다. 그런 애들이 너무 많아서 기억하기 어려우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조금 더 저를 설명하자면, 선생님이 첫 담임을 맡으셨던 일학년 반의 부반장이었던 응응 입니다ㅇㅇ입니다. 저도 어느새 그때의 선생님보다 더 많이 나이를 먹어서, 벌써 꽉 찬 마흔이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2월생이라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가서 다른 친구들보다는 한 살 적습니다. 이 정도로 대충 기억이 나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지 못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제게도 기억할만한 선생님으로 있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새벽의 공기를 폐 깊이 들이마시고 밤사이 차가워진 이슬을 맞으며 학교로 향하던 그때가 가끔 생각이 납니다. 당시에는 미세먼지 같은 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공기가 좋았더랍니다. 지금은 마스크를 쓰고 핸드폰의 앱으로 공기 질을 점검하다가도, 하늘이 맑고 투명했던 그때를 그리워하곤 한답니다. 지금도 바뀌지 않은 건 교복을 입는다는 것이지만, 그때 당시에도 춥더라도 치마로 만들어진 교복을 매일같이 입고 차가운 공기를 이겨내려 작은 주머니에 손을 꾸깃거리며 집어넣고 올라가던 게 기억납니다. 학교는 왜들 그렇게 산꼭대기에 지어졌는지 함께 통학하던 친구들과 원망하며 '내 다리는 무가 되어가고 있다', '대학 가면 붓기가 좀 빠질까?빠질까' 등의 고민을 토로하며 대문까지 올라갔었지요. 선생님도 그 길을 매일같이 오르락내리락하셨겠지요? 선생님은 그때 당시에 차를 학교로 가져오지 않으셨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운전하시는 걸 볼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매일같이 청소해서 먼지가 거의 없던 건물 입구에서 신발을 벗어들고 종종거리며 반의 복도까지 맨발로 걸어가다 보면 때가 낀 하얀 실내화들이 있던 신발장이 있었고, 실내화를 내려 얼른 시린 발을 집어넣고는 바로 교무실로 향했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통학하는 바람에 새벽 6시 반에 출발하는 첫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었으니 그 시간에는 거의 제가 매번 1등으로 도착했었습니다. 지금 다시 그 생활을 다시 하라고 한다면 전 두손 두발 다 들고 하얀 백기를 흔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그 시간에 일어나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더라고요. 사실 그때도 6시에 일어나서 부랴부랴 챙겨서 학교를 가는 것도 불만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다른 애들은 모두 자는 시간에 일어나야 하는 것에 대한 모티베이트가 없었습니다. 체력은 가득했지만, 아침에 비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그럼에도 좋았던 건 교무실에 가서 출석부와 열쇠를 챙겨 나오는 성취감과 처음 반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창문을 열 때의 상쾌함이었습니다. 물론 선생님도 출근을 빨리하시는 편이라, 커피를 한 잔 뽑아 들고 선생님께 드리는 즐거움도 놓칠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의 소녀였던 제게는 그렇게라도 선생님과 한마디를 더 한다는 게 꽤 큰 기쁨이었을 겁니다. 지금은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셔도 그때의 맛을 100% 재현하지를 못합니다.
대략 7시 30분 정도가 지나고 나면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실로 들어옵니다. 그때 당시에는 딱히 제가 하던 리츄얼도 없었기에 수업 전까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냈을지도 의문입니다. 엎드리기만 하면 잠이 들던 때이니 물먹은 나무 냄새를 맡으며 엎드려있거나 빌려놓은 만화책을 봤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2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언제나처럼 7시 반쯤에는 애들 몇몇이 두런두런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선생님이 우리 반 교실로 들어오셔서 깜짝 놀랐었습니다. 아마 손에는 늘 들고 다니시던 길지 않은 작대기가 하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음, 아닐 수도 있고요. 들어오셔서 애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거셨습니다.
"너희 아침밥은 먹고 왔니?"
"아뇨~", "네~" 라고 몇몇이 답을 했고 저는 아마도 몹시 반가워서
"저는 먹고 왔어요!" 라고 크게 대답을 했었을 겁니다. 그때 돌아온 선생님 대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넌 좀 굶어도 된다!" 위와 같이 말씀하시곤 교실을 조금 더 둘러본 뒤에 나가셨습니다. 주변 애들은 의외의 선생님의 반응에 조금 놀라 저를 보고 웃었습니다. 그 후로는 아마 선생님이 교실로 오신 적이 없었을 겁니다.
그때 당시에는 좀 서운했었던 것 같습니다. 친한 애들에게 내가 좋아했던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며 칭얼댔을 겁니다. 그런데 그 기억이 이렇게 오래 갈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그런데 마흔이라는 나이가 되어 돌이켜보면 선생님이 나름의 친근함의 표시로 그렇게 말씀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그런 말씀을 했다는 기억은 전혀 안 나시겠지만요. (ㅎㅎ)
저에겐 글 쓰는 취미가 있습니다. 제가 2학년 때 과제로 낸 수필과 시(詩)가 교내에서 장려상을 받고 한복희 선생님(성함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맞겠지요)의 추천으로 시(市)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시 부문 장원을 받고는 제 나름대로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그전까지는 글 쓰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저 그렇게 친하던 친구들조차 "얘가 내 친구야!!" 하고 자랑하고 다니기도 했었고, 당시 담임선생님과 국어 과목 선생님들이 대학교를 국문과로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추천하시기도 하셨거든요. 물론 집에 가서 엄마에게 단칼에 거절당했습니다. 글쟁이로는 밥 벌어먹지 못한다고요. 웃기게도 별로 서운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글 쓰는 것에 크게 재주는 없습니다. 그저 취미로 쓰는 수준입니다. 대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모두 컴퓨터디자인에 관한 과를 갔고, 지금도 하는 일이 그래픽디자인이거든요. 글 쓰는 취미는 생활에 큰 도움까지는 안 되어도 바쁘게 지내는 일상에서 꽤 살아가는 모티브가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전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2001년부터 상경하여 일하다 서울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지금까지 줄곧 지내고 있습니다. 서울이 사람도 많고 뭐든 많아 갑갑하긴 한데, 가끔 내려가는 고향이 있는 것도 꽤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워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알고 있거든요. 선생님의 소식이 궁금하여 가끔 구글링을 해 보는데, 별로 건질만 한 소식은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도 거의 없고(있다고 해도 학교일에 전혀 관심 없던 아웃사이더들이라) 동창회에도 부지런히 참여하는 성격이 못 되거든요.
선생님도 이제 연세가 많이 드셨겠습니다. 청년이었던 모습만 기억나는데 선생님은 저의 어린 시절만 기억나시겠지요? 그것도 그것대로 좋은 것 같습니다. 시간이 유수같이 흐르다 보니 지나간 추억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아직 펼쳐야 할 미래가 더 많은데도 불구하구요. 아직은 저도 하루하루 해결해야 할 일이 산재하고, 개척해야 할 길도 구만리 같습니다. 선생님을 찾아뵐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 혼자 찾아뵙기에는 아직 용기는 나질 않고, 같이 가자고 할 만한 친구도 떠오르지 않거든요. 게다가 1학년 때 같이 반장을 하던 친구는 지금 애 셋의 엄마가 되어 무척이나 바빠 보이더라고요. 연락은 잘 하지 않지만 SNS에 떠 있는 사진으로 대강 파악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선생님도 아직 '현재 진행 중'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백세시대가 된 지금은 선생님의 시계도 아직 퇴근 시간이 되려면 한참 멀었을 거예요.
바쁘게 날마다 지내다가도 가끔 이렇게 추억하는 것도 쌓인 긴장을 푸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편지 드리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에도 축복이 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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