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기시미 이치로라는 일본작가의 [마흔에게,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라는 책의 서두를 읽었다. 그는 중년의 나이를 맞이한 자들에게 '나이듦의 기쁨'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하고자 했다. 몸의 건강이나 정신의 건강을 중요하게 여겨야 함은 물론이고 욕심을 버려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말을 우리는 어릴적부터 입버릇 처럼 달고 살았던지라 머릿속에 깊이 뿌리박혀있다. 그리하여 몸이 불편하지 않는 이상은 어떠한 일을 할 때 함께 해야 마음이 편했고, 다른 사람이 아무것도 안하는건 기분이 거슬리기도 했지만 내가 좀 더 일하다 몸이 불편해도 맘이 편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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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어떤 순간이든 성과의 크기를 묻고 '생산성'을 기준으로만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발언들을 도처에서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일하는 순간에는 생산성도 중요하겠죠. 하지만 인간의 가치마저 생산성에 두면 안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병에 걸리고 나이가 들어서 전처럼 일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옛날에는 더 솜씨 좋고 완벼하게 일을 처리했는데....'라며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가치를 생산성에서 찾지 않게 되면 몇 살이 되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가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과거에 비상근으로 일주일에 한 번, 정신과 클리닉 데이케어센터에 근무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날에는 센터 이용자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데이케어센터 : 주로 65세 이상의 노인성 질환자 및 심신 허약으로 인해 보호가 필요한 노인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곳)
먼저 직원이 메뉴를 정하고 "재료를 사러 갑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육십 명 가운데 대여섯 명에 불과합니다. 장을 보고 "자, 이제 함께 만듭시다"라고 해도 참가하는 인원은 고작 열댓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요리가 완성되고 "이제 먹읍시다"라고 하면 모두가 모입니다.
그래도 그 클리닉에서 돕지 않은 사람을 절대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힘이 나서 도왔지만 다음 주에는 도울 수 없을지 모르고, 이번 주도 다음 주도 도울 수 없을지 모르니까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장을 보거나 요리한 사람만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도 맛있게 먹음으로써 음식을 만든 사람에게 공헌했기 때문입니다. 일한 사람도, 일하지 않은 사람이 맛있게 식사를 하는 데 공헌했습니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가 아니라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일할 수 있을 때 일한다'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미안하다'고 여길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사람만 일하는 이 클리닉이야말고 건전한 사회의 축소판이자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어떤 상태든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살아 있는 것만으로 타자에게 공헌할 수 있다.'
이처럼 생각하면 늙는 것도 병에 걸리는 것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공헌한다는 실감은 인생의 행복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양식이자, 행복의 초석입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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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락을 읽으면서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솔선수범'한다거나 '모범'을 보인다는 생각으로 나서서 했던 일이었고 마음속으로는 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낄거야'라는 의뭉스런 생각으로 가득 찼던 자신을 반성하게 됐다. 이 책을 읽고는 적어도 그런 일이 있을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그것이 기쁨이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노동의 신성함'이라거나 '노동의 참가치'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가 움직여서 무언가를 만들거나 혹은 깨끗하게 한다거나는 행위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긴다. 다만 이 글을 읽음으로 인하여 꼭 분주히 움직여 남에게 도움이 되어야만 '일'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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